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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량(比量)-2(終)
글쓴이 : 지상사 날짜 : 2014-08-01 (금) 08:02 조회 : 961

비량(比量)

 그런데 직접 보거나 듣는다는 것과 생각만 한다는 것이 서로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가 바로 현량(現量)과 비량(非量)과의 사이에 있는 원리적(原理的) 관계의 근거이다. 본다라는 현량적 인식은 따지고 보면 보고 안다라는 뜻의 말이다. 만약 불이 눈 앞에서 활활 타고 있음을 보면서도 불이 타고 있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도 떠 오르지 아니한다면 불이 타고 있음을 보기는 보면서도 불이 타고 있는 줄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거울이 불을 비치기는 비치면서도 불이 타고 있다는 생각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불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본다는 말은 그 말이 만약 거울에 불이 비치듯이 다만 불이 눈에 비치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고 불이 있음을 안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라면, 본다는 말은 분명히 보고 안다는 뜻의 말이며, 그 때의 그 안다함은 생각한다라는 뜻 이외의 다른 것을 뜻하는 말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보고 안다는 현량적 인식에서나 생각만 하여 안다는 비량적 인식에서나 모두 생각, 사유작용(思惟作用)에 의하여 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직접 보고 알든, 간접적으로 생각하여 알든, 그 어느 경우에나 무엇을 안다는 경우에는 반드시생각, 사유작용이 곁드려지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현량과 비량은 그 인식방법이 비교적 하나는 직접적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일 뿐이지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그 둘 사이에는 질적 차이는 없고 다만 양적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불이나, 눈감고 생각만 한 불이나, 사실은 둘 다생각된 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시 눈 앞의 현장에 보이고 있는 현량적 불은 뜨거운 불이고, 산 넘어에서 타고 있다고 생각만 된 보이지 않는 불은 직접 뜨겁지는 않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런 반박은 사실상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눈 앞의 현장에서 타고 있는 불이라도 그것이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불이 아니고 피부에 느껴지는 불이라야 비로소 뜨겁다, 즉 불의 뜨거움은 피부의 촉감이 인식하는 것이지 눈이 뜨거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눈에 보이는 불은 빛나기만 할 뿐 뜨겁지는 않은 불이고 피부에 느껴지는 불이라야만 비로소 뜨거운 불이다.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눈은 빛으로 불을 알고 피부는 뜨거움으로 불을 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분석하여 말한다면 눈에 비쳐서 아는 불은 결코 뜨거운 불이 아니고 피부에 느껴져서 아는 불이라야만 비로소 뜨거운 불이다. 그래서 피부에 뜨거웁게 느껴져서 알려진 뜨거운 불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는 빛 없는 불이다. 눈을 감고 피부로만도 알 수 있는 불이라야 비로소 그것이 뜨거운 불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피부에 느껴지는 뜨거운 불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눈에 비치는 불이나 마찬가지로 뜨거웁다고 생각된 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이 아무리 돌 위에서 타고 있어도 돌은 뜨거운 줄을 모른다. 돌은 뜨거워도 뜨겁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피부도 돌처럼 아무리 불이 피부에 접촉되면서 탈지라도 뜨겁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피부는 마치 거울이 불을 비치면서도 불이 있음을 알지 못하듯, 불의 뜨거움을 알지 못할 것이며 뜨거운 불이 거기에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피부에 느껴지는 뜨겁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뜨겁다고 생각한다라는 말 밖에 다른 뜻일 수는 없다.

  위와 같이 따지고 본다면 우리가 무엇을 먹는다라고 할 때에도, 먹는다는 결국 먹는다고 생각함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산다는 것은 산다고 생각함이며, 내가 있다는 결국 내가 있다고 생각함에 지나지 않는다. 나고 죽는다고 하지만 실은 나고 죽는게 아니고 나고 죽는다고 생각함이며,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은 하나의 철학적 진리로 꼽히는 명언이며, 또 인도의 인식논리학자들은 데카르트보다도 이미 천여년 이전에 데카르트였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만약 생각이란 하면 있고 아니 하면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있다고 생각된 모든 것은 생각을 하지 않음에 의하여 없어질 수도 있고, 또 더 나아가서 생각이란 것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먹거나 수양(修養)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있다고 생각된 모든 것은 마음먹고 수양하는 데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든가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의 인명논리적(因明論理的)근거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비량은 현량보다 비교적생각만에 의존된 인식이라는 특징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이 비량에 있는 데, 그것은 비량은 반드시 (언어)의 형식을 취하여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비량이 반드시 말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까닭은, 비량은 반드시생각에 의하여야 하는 데생각이라는 것은 어떤생각이든 반드시 말을 매개로 하여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적어도 무슨 생각을 하기만 한다면 그 때의 그 생각은 반드시 그무엇〉을 생각함이며, 그 때의 그 생각된무엇은 반드시 개념적인 것이고 그 개념은말의 의미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그런 뜻에서 개념은 말의 형식을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으니, 따라서생각은 말의 형식을 벗어날 수 없고, 비량은 말의 형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량에서는,,가 모두 말로 표현되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말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비량이 말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면서도 속으로 혼자서만 생각하여 아는 데에 그치는 경우는 그것을위자비량(爲自非量)이라 하고,위자비량(爲自非量)을 남에게 전달하여 알릴 목적으로 직접 말을 하여 표현하는 경우는위타비량(爲他非量)이라고 한다. 비량에는 이렇게위자비량(爲自非量)위타비량(爲他非量)의 두 가지가 있다.-(終)  (印度哲學思想-元義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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